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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악의 전염병 페스트 흑사병
흑사병은 페스트 균(Yersinia Pestis)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 열성 전염병으로 치사율 50% ~ 80% ( 약 7,500만명 ~ 2억 명 사망), 지금까지 발견된 전염병 중 사람을 가장 단기간에 죽음에 이르게 한 질병입니다. 지금부터 흑사병이 왜 인류 최악의 전염병이라고 불리우는지 유럽 중세시대 역사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시대적 배경 ( 유럽중세 시대)
위생 관념이 현재와는 많이 달랐던 중세시대에는 사체를 거름으로 사용했으며, 흙으로 시체를 닦았습니다. 의사들은 시신을 부검한던 손으로 산모의 출산을 도왔고, 병에 감염된 환자의 피를 뒤집어 쓴 채로 다른 환자를 치료 했습니다. 벼룩이나 쥐 등 유해생물에 대한 방제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했습니다. 한편,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유럽사회에는 반성의 기운이 일어났습니다. 목숨을 걸고 행한 성전의 결과는 참혹했고, 민심은 지도층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흔히 "암흑기"로 표현되는 중세유럽은 이때부터 신(god) 중심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대 하자는 생각이 싹 트기 시작했고, 봉건제도의 결속보다는 개인, 내세 보다는 현세를 중시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 운동 "르네상스"의 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문주의 운동이 막 시작되려고 하던 이탈리아에 새로운 전염병이 찾아왔습니다.
대역병의 시작 ( Great Plague )
피부가 검게 변하여 흑사병 이라는 이름이 붙은 페스트, 이 질병을 일으키는 페스트 균은 중앙아시아의 서식하는 쥐 등의 설치류에 기생하던 쥐벼룩을 중간 숙주로 하는 박테리아 입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에 창궐하기 시작한 페스트는 몽골제국의 킵차크칸국 유목민들이 쥐와 접촉하면서 그 감염이 시작되었습니다. 1347년 킵차크칸국의 군대가 크림 반도에 있는 제노바의 식민도시 카파(우크라이나 페오도시아)를 침공했는데, 도시 가파를 침공 했는데 이 전투에서 몽골군 군대가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은 시체를 적진에 쏘아 보냄으로써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킵차크칸국과 제노바인들은 이 일로 인해 전 유럽에 끔찍한 재앙을 가져올 줄 알지 못했습니다.
죽음의 배 ( Death Ships )
1347 년 10월경, 흑해에서 출발한 12척의 제노바 상선이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에 도착했습니다. 상선을 맞이 하러 간 주민들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선단의 선원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으며 생존자 역시 전신을 뒤덮은 고름과 검은 부종을 보이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떠난 직후 항구 주민들 역시 선원들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면서 죽어갔고 전염병은 삽시간에 시칠리아 전체로 퍼졌으며, 주민들이 각지로 이동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감염자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로써 몽고인과 같은 유목민이 아닌 정착민, 농경민의 세계에 전파된 페스트는 이내 전 유럽에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1347 연말,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이어 1348 년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감염자가 발생했으며, 이베리아반도의 아라곤 왕국에까지 퍼져나가게 됩니다. 1349 년에는 영국의 웨이머스항에 패스트가 도착, 수 개월 뒤 런던을 거쳐 스코틀랜드 까지 전파됩니다.
"흑사병이 1348년 본 항구를 통해 영국에 유입되다. 이 병으로 국민 전체의 30%에서 50%가 사망하다."
유럽 전역을 강타한 흑사병
1,350 년에는 국내 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페스트 감염자가 발생했습니다. 전염병이 짧은 기간내 유럽 전역에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중세 라는 시대적 한계에 따른 의학지식의 부족과 그에 따른 비위생, 제도적 미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세 말기의 선박 기술이 발달하고 국가 간 교역량이 증가하고 있었고 주요 교역로와 중심지 등의 도시가 성장 하기 시작했는데 인구가 밀집해 있는 공간은 전염병이 창궐하고 전파되기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일부 도시들은 전염병의 존재를 파악하고 환자들과 일반인들을 격리 시켰고, 환자가 사용한 물건을 태우는 등 방역 조치를 취하기도 합니다. 또한 시체를 운반하는 사람이나 의사와 같이 페스트에 노출되는 시간이 긴 사람들의 경우에는 안면 마스크까지 쓰기도 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패스트로 부터 감염을 막기 위한 복장을 한 의사를 두고 민간에서는 역병의사 "닥터 신나벨 폰 놈" 이라고 부르며 이들이 페스트 환자의 집을 방문하고 나오면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속설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닥터 쉬나벨 폰 롬
( Doktor Schnabel von Rom )
로마 출신의 부리가면 박사
※ 흔히 알려진 닥터 쉬나벨의 모습은 17세기 이후 등장
닥터 쉬나벨은 새부리 가면을 쓰고 길고 검은 겉옷과 검은 모자를 착용한채 지팡이를 쥔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는데, 그 기괴한 이미지는 음침한 느낌을 주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곤 했습니다. 흑사병, 페스트로 인해 유럽은 수년에 걸쳐 끔찍한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병으로 인해 7,500만명 ~ 2억 명의 인구, 즉 당시의 유럽 인구의 1/3에서 절반에 이르는 사람이 사망하게 됩니다.
이 전염병에는 의사의 조언도 치료도 필요 없었다.
아무도 무슨 병인지 몰랐고
그때까지 그 병을 연구한 의사도 없었다.
하층계급과 대다수의 중산계급은 상황이 훨씬 비참했다고 한다.
그들은 한집에 모여 살거나 서로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매일 수천 명씩 감염됐다.
모두가 작은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 갔다.
길거리에는 밤낮없이 수많은 시신이 나뒹굴었고 집 안에는 더 많았다.
데카메론 - 지오바니 보카치오 -
흑사병으로 피어난 르네상스 시대
유럽을 휩쓴 페스트의 대유행 뒤에 종교와 문화, 교육과 사회, 경제 등 유럽이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계기가 됩니다. 페스트로 성직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중세 유럽인들은 더는 신앙의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켜주는 의술과 과학, 이성에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인문주의를 발전시켰고 르네상스 라는 새로운 문명과 문화를 열어 주게 됩니다. 그리고 페스트의 창궐로 유럽의 인구가 크게 줄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기존 유럽을 지탱하던 봉건제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농민 계층 의 급격한 감소는 이들의 가치를 높였고 농노는 도시로 떠나 상인과 수공업자로 변신 하거나 스스로 주인이 되어 토지를 경작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봉건제를 유지하던 농노 제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 입니다. 반면 농노를 지배하고 영지를 경작 시킴으로써 부를 쌓아 올리던 봉건 영주들은 그 힘이 줄어들게 되었고, 중세 봉건 주의 경제 기반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렇게 14세기 유럽을 집어 삼킨 페스트는 유럽 중세시대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